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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54 2014/10/05 06:54
병신도(病信徒)를 깨운다.
2014/10/05 06:54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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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몇 분의 형제님들로부터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겪고 있는 절박한 어 려움을 호소하는 메일들을 받았습니다. 실명을 밝히신 그 분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담임목사님들의 탐욕적인 행태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었고, 그 다 음으로는 그런 목사님들에게 무조건 맹종하고 순응하는 장로님들과 제직들에 대한 절망감과 탄식이 공통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형제님들이 장로님들이나 주요 어른들을 만나 "교회를 이렇게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담임목사님께 건의하여 이를 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꺼내면, 거의 다 완고하게 거절하거나 직접 가서 말해보라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꽉 막힌 절벽처럼 교회의 중직을 맡은 이 분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물론 담임목사님에게 가서 직접 건의를 하면, 순종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내 교회이니, 싫으면 네가 떠나라"는 식의 답변이 거의 공식이었다고 합니다. 

목사에게 맹종하는 교인들

심지어 교인수가 350여 명 정도인 어느 지방 소읍에 있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연봉을 1억 원이나 받고 있으며, 게다가 일반 교인들은 타기 어려운 최고급차를 타고 부흥강사까지 하며 수시로 돌아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소읍에서 연봉 1억이 중류 가정의 수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교회 운영면에서도 마치 목사 개인 사업체처럼 왕같은 권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그 교회 제직들과 교인들의 순응적인 협력과 지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비단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수많은 다른 교회에서도 부패한 목사님들이 개인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부정을 행하고, 활개칠 수 있도록 화려한 멍석을 깔아 주고 있는 충성된 일꾼들이 바로 이런 우직한 분들이 아닐까요. 이렇게 담임목사님께 무비 판적으로 맹종하는 제직들과 교인들이 바로 이 글의 주제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교회가 줄줄히 늘어서고, 아울러 지방의 농어촌 지역이나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도 교회가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와 교인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는 이런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그동안의 고속성장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는 비판자들로부터 세가지의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름이 '개독교'이며, 다음은 목사님들에게 주어진 '먹사'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들에게 선사된 '병신도'라는 이름입니다. 이것 또한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수치스러운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튼 한국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절대 못 참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왜 개독교와 먹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생략하고, 이 글에서는 이 병신도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몇가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병신도'라는 말은 사실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비속한 단어입니다. 그 말을 쓰는 자체로 다른 분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비판자들이 이를 사용한 것은 '평신도'와 발음이 매우 비슷한데 다가, 나름대로 '병이 들어 잘못된 신도의 상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서 채용한 속 어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들은 빈병같이 속이 비었다는 의미로 한자어 '甁信徒'로 쓰 기도 하는 데, 그것도 역시 일리가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필자도 이 글에서 불가피하게 '병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어떤 특정인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의미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알려지고 있는 용어이기에 부득이 쓰고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신도를 키운 사람들

그러면 어떻게 평신도가 병신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요. 구태여 왜 이런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요. 필자는 그 답을 필연적으로 먹사님들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들을 키운 사람들이 먹사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먹사'란 보통의 건전한 목사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사님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족 목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깨달을수록, 자신들의 비지니스에 더 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중세 교회 성직자들이 신도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아 못 읽게 만든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단순히 성경을 몰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니, 정말 인간의 간악함과 그 무지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절망감마저 듭니다. 

하여튼 먹사님들이 바라는 최고의 교인이란 자신들의 말에 잘 따르고 적당히 똑똑한 병신도입니다. 고려대학교 김인수 교수는 이를 잘 지적하여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안정적이고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병신도가 되 고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어 갈 것이다"라고 이미 한국교회에 단호하게 경고한 바가 있 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먹사님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자신의 멋진 비지니스로 알기 때문에, 교회의 운영이나 목회의 초점이 항상 양떼의 양적 성장과 털깍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양들의 영혼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양들의 숫자와 몸집만 크게 키워 철따라 털을 깍아 수입을 올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의 내용이 매우 다양한 것같고 제법 신앙적인 것처럼 보 이나, 결국은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로 귀결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들의 교회 에서는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다 결국은 비지니스 확대를 위한 멋진 명분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가 도둑질이나 악행을 가르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 교회에 출석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영리한 먹사님들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경건하며 능력있는 성직자처럼 가장하고, 교인들에게 다양한 신앙 프로 그램과 그들을 크게 감동시킬만한 그럴 듯한 사업들을 제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거창한 해외선교, 예배당 건축, 총동원 전도, 미자립 교회 돕기, 불우이웃 돕기, 그리고 기타 봉사 활동들입니다. 어찌보면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일이 없는 정상적인 사업들입니다. 그리고는 현란하고 멋진 화술로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 며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호소합니다,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주님을 향한 사 랑과 열정으로 우리 한번 해보자! 순교적 각오로 나가자!". 그런 후에 양념으로 세계가 어쩌고 민족이 저쩌고 하며 헛바람을 조금만 더 넣어주면, 대부분의 순진한 교인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거기서 게임이 끝나버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으로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같지만, 소위 믿음이 좋다는 교인들일수록 더 잘 넘어 갑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매우 지각있는 극히 일부 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연스레 목사에게 맹종하는 병신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얼핏 들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은 말인데다가 집단적으로 하도 자주 최면을 거니, 나중에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담임목사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먹사님들은 인기 연기자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설교도 매끄럽게 잘 하시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이 그를 참된 목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순수하게 잘하다가, 배가 부르고 명예를 조금 얻더니 변절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근자에 들어서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상당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편안히 호의호식을 즐기시더니 아예 단체로 동맥경화라도 걸린 듯, 양심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진리마저 버린 변절자들을 우리는 한국교회내에서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하여튼 병신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 인격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정의해도 큰 오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은, 목사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신도들에게는 몇가지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유형 교회 그 자체 를 매우 신성시합니다. 따라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목사를 '주의 사자'처럼 믿고 높게 대접하며 맹종합니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행사나 프로그램에 무비판적으로 적극 참여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합니다.

둘째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잘합니다. 남들이 적게 내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성격이 착실하며, 자신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누가 자신들의 교회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정색을 하고 변호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목사 수준에 걸맞게 세속적인 복과 성취를 매우 중요시하며 그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쉬운 대로 병신도 명단에 준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충분히 됩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의 제자'로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목사에게 배운 내용대로 따라 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판단해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이 분들 대다수는 성경 지식이 적지 않으나 심한 편식으로 인하여 영양 불균형 상태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을 배워도 헌신과 헌금을 통하여 복받고 잘된다는 부분을 주로 배우고 또한 그 깊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다보니, 이 병신도와 먹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교회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 닐 수 없습니다. 먹사들은 갖은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욕심을 채우고, 신도들은 이를 아주 좋게 여기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즉 먹사는 병신도들을 양산하고, 그런 병신도들은 먹사의 악행을 지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든 교회들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제자훈련도 하고 바쁘게 보냈는데, 요즘은 깨울 평신도들마저도 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한 생각마저 듭니다. 다 스스로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병신도들이 주변에 널렸기 때 문입니다. 그래도 예전의 평신도들은 순박했던 편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스스로 독실한 신앙인인데다가 설탕만 주로 먹고 자라서 단소리가 아니면 잘 듣지를 않습니다. 어쩌다 쓴소리를 좀 하면, 대부분은 성경까지 잘 인용하시며 오히려 매우 거친 반격을 거침없이 되돌려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여튼 과거에는 조용히 자던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몽유 병에 취한 듯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신도를 깨워야만 하는 암담한 기분마저 듭니다. 물론 이는 훨씬 더 어렵고 힘드는 일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매우 완고한 데다 스스로 똑똑하며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깊은 매트릭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여기까지 병신도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는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분기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의 순박했던 평신도를 깨워야 하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앞으로는 고도의 매트릭스에 빠진 완고한 병신도를 깨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나 이웃 교회에 가서, "당신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좀 똑바로 하시오!" 라고 소리친다면, 입구에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몸으로 때워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방법론을 좀 시원하게 말해보라면 정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평신도들은 지금보다 더 무지하고 완고하였습니다. 중세 천년 이상을 어두운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따라서 과거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따르며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삼허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좁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눈에 보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병신도 문제도 마치 거대한 빙산같이 서서히 녹아 질 것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병신도들도 자연히 함께 동화되고 변화되어 참된 주의 제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가르치고,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문제를 푸는 당연하고도 유일한 해법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삶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에서도 구체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동안의 외적 성장에 자만해 있던 개혁교회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각성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병신 도'란 이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병신도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병이 들어 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병든 신도가 되어 교회와 사 회에 누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병신도를 깨우는 일은 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병신도는 우리의 형제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병신도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며 자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분들을 깨우고 도와서 참된 동역자로 세우고 진정한 예배, 선교, 구제, 교육, 그리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는 일은 개혁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이며 소홀히 해선 안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리고 비록 이 일이 어려울지라도, 너무 낙심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 신자들의 가슴마다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5: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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