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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54 2014/10/05 06:54
병신도(病信徒)를 깨운다.
2014/10/05 06:54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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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몇 분의 형제님들로부터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겪고 있는 절박한 어 려움을 호소하는 메일들을 받았습니다. 실명을 밝히신 그 분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담임목사님들의 탐욕적인 행태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었고, 그 다 음으로는 그런 목사님들에게 무조건 맹종하고 순응하는 장로님들과 제직들에 대한 절망감과 탄식이 공통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형제님들이 장로님들이나 주요 어른들을 만나 "교회를 이렇게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담임목사님께 건의하여 이를 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꺼내면, 거의 다 완고하게 거절하거나 직접 가서 말해보라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꽉 막힌 절벽처럼 교회의 중직을 맡은 이 분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물론 담임목사님에게 가서 직접 건의를 하면, 순종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내 교회이니, 싫으면 네가 떠나라"는 식의 답변이 거의 공식이었다고 합니다. 

목사에게 맹종하는 교인들

심지어 교인수가 350여 명 정도인 어느 지방 소읍에 있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연봉을 1억 원이나 받고 있으며, 게다가 일반 교인들은 타기 어려운 최고급차를 타고 부흥강사까지 하며 수시로 돌아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소읍에서 연봉 1억이 중류 가정의 수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교회 운영면에서도 마치 목사 개인 사업체처럼 왕같은 권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그 교회 제직들과 교인들의 순응적인 협력과 지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비단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수많은 다른 교회에서도 부패한 목사님들이 개인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부정을 행하고, 활개칠 수 있도록 화려한 멍석을 깔아 주고 있는 충성된 일꾼들이 바로 이런 우직한 분들이 아닐까요. 이렇게 담임목사님께 무비 판적으로 맹종하는 제직들과 교인들이 바로 이 글의 주제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교회가 줄줄히 늘어서고, 아울러 지방의 농어촌 지역이나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도 교회가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와 교인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는 이런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그동안의 고속성장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는 비판자들로부터 세가지의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름이 '개독교'이며, 다음은 목사님들에게 주어진 '먹사'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들에게 선사된 '병신도'라는 이름입니다. 이것 또한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수치스러운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튼 한국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절대 못 참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왜 개독교와 먹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생략하고, 이 글에서는 이 병신도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몇가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병신도'라는 말은 사실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비속한 단어입니다. 그 말을 쓰는 자체로 다른 분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비판자들이 이를 사용한 것은 '평신도'와 발음이 매우 비슷한데 다가, 나름대로 '병이 들어 잘못된 신도의 상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서 채용한 속 어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들은 빈병같이 속이 비었다는 의미로 한자어 '甁信徒'로 쓰 기도 하는 데, 그것도 역시 일리가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필자도 이 글에서 불가피하게 '병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어떤 특정인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의미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알려지고 있는 용어이기에 부득이 쓰고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신도를 키운 사람들

그러면 어떻게 평신도가 병신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요. 구태여 왜 이런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요. 필자는 그 답을 필연적으로 먹사님들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들을 키운 사람들이 먹사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먹사'란 보통의 건전한 목사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사님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족 목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깨달을수록, 자신들의 비지니스에 더 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중세 교회 성직자들이 신도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아 못 읽게 만든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단순히 성경을 몰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니, 정말 인간의 간악함과 그 무지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절망감마저 듭니다. 

하여튼 먹사님들이 바라는 최고의 교인이란 자신들의 말에 잘 따르고 적당히 똑똑한 병신도입니다. 고려대학교 김인수 교수는 이를 잘 지적하여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안정적이고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병신도가 되 고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어 갈 것이다"라고 이미 한국교회에 단호하게 경고한 바가 있 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먹사님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자신의 멋진 비지니스로 알기 때문에, 교회의 운영이나 목회의 초점이 항상 양떼의 양적 성장과 털깍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양들의 영혼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양들의 숫자와 몸집만 크게 키워 철따라 털을 깍아 수입을 올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의 내용이 매우 다양한 것같고 제법 신앙적인 것처럼 보 이나, 결국은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로 귀결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들의 교회 에서는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다 결국은 비지니스 확대를 위한 멋진 명분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가 도둑질이나 악행을 가르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 교회에 출석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영리한 먹사님들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경건하며 능력있는 성직자처럼 가장하고, 교인들에게 다양한 신앙 프로 그램과 그들을 크게 감동시킬만한 그럴 듯한 사업들을 제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거창한 해외선교, 예배당 건축, 총동원 전도, 미자립 교회 돕기, 불우이웃 돕기, 그리고 기타 봉사 활동들입니다. 어찌보면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일이 없는 정상적인 사업들입니다. 그리고는 현란하고 멋진 화술로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 며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호소합니다,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주님을 향한 사 랑과 열정으로 우리 한번 해보자! 순교적 각오로 나가자!". 그런 후에 양념으로 세계가 어쩌고 민족이 저쩌고 하며 헛바람을 조금만 더 넣어주면, 대부분의 순진한 교인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거기서 게임이 끝나버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으로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같지만, 소위 믿음이 좋다는 교인들일수록 더 잘 넘어 갑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매우 지각있는 극히 일부 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연스레 목사에게 맹종하는 병신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얼핏 들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은 말인데다가 집단적으로 하도 자주 최면을 거니, 나중에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담임목사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먹사님들은 인기 연기자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설교도 매끄럽게 잘 하시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이 그를 참된 목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순수하게 잘하다가, 배가 부르고 명예를 조금 얻더니 변절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근자에 들어서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상당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편안히 호의호식을 즐기시더니 아예 단체로 동맥경화라도 걸린 듯, 양심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진리마저 버린 변절자들을 우리는 한국교회내에서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하여튼 병신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 인격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정의해도 큰 오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은, 목사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신도들에게는 몇가지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유형 교회 그 자체 를 매우 신성시합니다. 따라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목사를 '주의 사자'처럼 믿고 높게 대접하며 맹종합니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행사나 프로그램에 무비판적으로 적극 참여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합니다.

둘째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잘합니다. 남들이 적게 내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성격이 착실하며, 자신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누가 자신들의 교회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정색을 하고 변호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목사 수준에 걸맞게 세속적인 복과 성취를 매우 중요시하며 그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쉬운 대로 병신도 명단에 준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충분히 됩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의 제자'로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목사에게 배운 내용대로 따라 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판단해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이 분들 대다수는 성경 지식이 적지 않으나 심한 편식으로 인하여 영양 불균형 상태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을 배워도 헌신과 헌금을 통하여 복받고 잘된다는 부분을 주로 배우고 또한 그 깊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다보니, 이 병신도와 먹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교회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 닐 수 없습니다. 먹사들은 갖은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욕심을 채우고, 신도들은 이를 아주 좋게 여기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즉 먹사는 병신도들을 양산하고, 그런 병신도들은 먹사의 악행을 지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든 교회들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제자훈련도 하고 바쁘게 보냈는데, 요즘은 깨울 평신도들마저도 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한 생각마저 듭니다. 다 스스로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병신도들이 주변에 널렸기 때 문입니다. 그래도 예전의 평신도들은 순박했던 편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스스로 독실한 신앙인인데다가 설탕만 주로 먹고 자라서 단소리가 아니면 잘 듣지를 않습니다. 어쩌다 쓴소리를 좀 하면, 대부분은 성경까지 잘 인용하시며 오히려 매우 거친 반격을 거침없이 되돌려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여튼 과거에는 조용히 자던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몽유 병에 취한 듯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신도를 깨워야만 하는 암담한 기분마저 듭니다. 물론 이는 훨씬 더 어렵고 힘드는 일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매우 완고한 데다 스스로 똑똑하며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깊은 매트릭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여기까지 병신도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는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분기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의 순박했던 평신도를 깨워야 하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앞으로는 고도의 매트릭스에 빠진 완고한 병신도를 깨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나 이웃 교회에 가서, "당신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좀 똑바로 하시오!" 라고 소리친다면, 입구에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몸으로 때워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방법론을 좀 시원하게 말해보라면 정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평신도들은 지금보다 더 무지하고 완고하였습니다. 중세 천년 이상을 어두운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따라서 과거 루터와 칼뱅이 그랬듯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따르며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삼허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좁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눈에 보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병신도 문제도 마치 거대한 빙산같이 서서히 녹아 질 것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병신도들도 자연히 함께 동화되고 변화되어 참된 주의 제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가르치고,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문제를 푸는 당연하고도 유일한 해법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삶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에서도 구체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동안의 외적 성장에 자만해 있던 개혁교회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각성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병신 도'란 이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병신도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병이 들어 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병든 신도가 되어 교회와 사 회에 누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병신도를 깨우는 일은 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병신도는 우리의 형제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병신도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며 자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분들을 깨우고 도와서 참된 동역자로 세우고 진정한 예배, 선교, 구제, 교육, 그리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는 일은 개혁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이며 소홀히 해선 안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리고 비록 이 일이 어려울지라도, 너무 낙심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 신자들의 가슴마다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5: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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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50 2014/10/05 06:50
성전 건축으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2014/10/05 06:50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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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전 건축'이란 말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뜻하며 또한 그의 지체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당은 그저 예배를 드리고 모이는 장소일 뿐입니다. 구약의 지성소처럼 무슨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제사를 받고 기도를 들으시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단순히 신도들의 편리를 위한 모임 장소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헌금 독려를 위해 이를 과대 포장하고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발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 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기서 '성전'이란 예수님 자신의 부활하실 몸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교회가 예배당 건축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00명이 모이면 500명이 모일 수 있게 지으려 하고, 그 뒤에 500명이 모이고 나면 다시 수 천명을 위한 건물을 지으려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평생 건물만 짓다가 볼장 다 보게 생겼습니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요. 교회가 무슨 건설 회사입니까. 어느 분은 이를 지적하여 "한국교회는 딱 세 마디를 한다.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라고 풍자하셨는데, 틀린 말이라고 반박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더욱 한숨이 나오는 것은 크게 지을수록 더 많이 채워진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 이기 때문입니다. 이 맛에 일부 목회자들은 빚을 내서라도 건물을 증축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교회들이 개미처럼 집짓기에 몸바쳐 열을 올리니 헌금에 이골 난 일반 교인들은 건축 헌금을 자주해야 하는 작은 교회를 기피하여 큰 교회로 몰리고, 큰 자가 이기는 자본주의 경제 원리처럼 대형 교회가 소형 교회 수 십개를 잡아 먹는 참상마저 생기게 됩니다. 즉 한 대형 교회가 교회당을 더 크게 지을수록 주변의 다른 여러 작은 교회들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악영향은 논외로 하더라도, 도대체 끝도 없이 건물만 짓다가 언제 제대로 일을 할 것인지 답답합니다. 보통 크기의 교회가 주요 예산을 건물에 투입하고, 또 교역자들 사례를 하고 나면 얼마나 남게 될까요. 이러니 구제비, 교육비, 선교비 등이 항상 축소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교회는 본연의 일보다는 몸집 부풀리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증식하기 좋아하는 괴물이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인체내의 암세 포입니다. 이 놈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처럼 스톱을 모릅니다. 주위의 다른 세포 를 좌충우돌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자신의 몸집만 키우는데, 결국은 환자가 죽어야 증식을 멈춥니다. 마치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듯 하지 않은지요. 

어떤 분들은 '교회가 더욱 커져야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세계 교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말로 대형 교회당 건축을 정당화하는 모양인데, 이는 순진한 교인들의 간을 키우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역사가 보여준 진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에게 정중히 말해주고 싶습니다. 큰 건물, 막강한 재력, 풍부한 인력 등 그딴 것 믿고 헛바람 든 소리하지 마시고, 교회 본연의 기본에 충실하시라고. 그런 것들은 다 모래성이고 아침 안개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세계와 세계 교회는 당신들보다 간은 작아도 머리는 훨씬 더 크니 아무 걱정마시고, 그 대들 교회나 똑바로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도 세계 최대 교회이니, 장자 교단이니 이 따위 소리 좀 하지 마시면 좋겠습니다. 이는 소녀시대 앞에서 율동 자랑하는 것 만큼이나 보기 민망합니다. 

필자는 자신 하나도 제대로 못 뒤집어 엎어 날마다 죽겠는데, 그대들은 무슨 여유가 있어 세계까지 움직이겠다고 난리인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세계가 그렇게 블도저를 몰고 삽질하며 밀어부친다고 움직이는 그런 만만한 상대로 보이시는지요. 

그리고 근자에 릭워렌 목사가 "대형화한 교회가 신도 개개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요란을 떠시는데,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 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무슨 개인 비지니스인가요, 고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바울이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선교하고 목회했나요. 오히려 필요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신도들을 꾸짖으며 목회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동성애 파티를 하자고 해도 그 요구에 맞 춰줘야 하나요. 교회의 우선적 임무는 무슨 복지 사업이 아니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 는 것입니다. 

목회는 '내 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양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지, 신도들의 종인가요? 이 분들은 근본적인 생각부터가 인본주의이니 목회를 주님의 일이 아닌 인간 비지니스로 수시로 착각합니다. 세계에 영향을 주겠다더니, 오히려 미국 교회의 한 미끌미끌한 목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느낌입니다. 릭워렌이 아니라 그 친구 할아버지나 사도 베드로가 말했어도 성경 원리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교회가 커져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참된 의인 몇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떼로 몰려 다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 같은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이 바뀌는 법입니다. 지금에야 위대한 사도들로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으나,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들은 출신도 배경도 그리고 학문도 초라한 가난한 어 부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무런 권력도 없고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 무명의 민초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후원하고 파송해줄 막강한 대형 교회는 커녕 대형 천막이나 하나 제대로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름없이 빛도 없이 고난을 받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고, 결국 후일에 로마제국의 황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몰아 처형시켰던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를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점을 정리하자면 건물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정치판 을 보십시요. 부실한 사람들일수록 겉을 치장하고 세력을 키우고 몰려 다니며 위세를 떠는 법이다. 건물을 키워 사람을 더 모으고 사람수로 영향역을 확대해보겠다는 그런 시도는 조잡한 세속의 방법입니다. 반면에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방법은 다 릅니다. 아무리 고급 레스토랑이 화려하고 시설이 좋아도, 요리사가 엉망이면 게임은 끝난 겁니다. 따라서 건물 타령하지 말고, 사람에 집중하자는 의미입니다. 

감리교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리는 대형 교회의 도움없이도 영국은 물론 미국까지 변화시키고 크게 영향을 끼친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당시 큰 교회들은 오히려 그를 비난하거나 내어 쫓았습니다. 지지 세력도 별로 없던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성경과 말 한필 정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존의 대형 교회도 하지 못 한 큰 일을 해냈습니다. 무디를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큰 교회나 세력을 의지해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교회도 사람도 물질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반면에 거대한 성당을 세우고 화려한 예배를 드리던 중세 교황과 주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요즘 고등학생들도 잘 압니다. 그 타락과 부패가 오죽 심했으면 세계사에 중세 암흑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까. 과거 찬란한 기독교문화가 있었던 유럽교회들의 그 웅장한 건물들을 한번 쳐다 보십시요. 

그들이 건물이 없어 오늘날처럼 허망하게 망했는지요. 수 천명이 모이던 그 곳에 지금은 노인들만 십여명 달랑 모여 예배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큰 건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르치고 구제하고 그리고 선교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무조건 짓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건축은 처음 한번만 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교인수가 증가하여 건물이 비좁게 되면 2부 3부예배로 운 영하고 그래도 터지게 비좁으면, 차라리 다른 교역자를 분가시켜 중소형 교회들을 확 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 교회가 끝도 없이 비대해져서 얻어지는 비리는 기존 대형 교회들이 이미 충분히 잘 보여 주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다보니 명예와 이권이 생기고, 이권이 생기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 니 세습도 하고, 공금횡령도 하고, 교권 싸움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귀족 목사님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슬며시 딴 생각이 나서 성추행도 하시고... 하여간 세상보다 더 썩은 곳이 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슨 삽질 회사처럼 건물 확장에 열내지 말고, 지역 사회를 섬기며 예배와 구제, 선교 그리고 교육 등 교회 본연의 임무에 보다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더 이상 먹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나오니 사명감도 자질도 안되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고, 또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목사가 되니 교회가 부패합니다. 

반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목회가 너무 힘들어 낙심이 되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들께 "힘내세요, 목사님! 지금 바른 길을 가고 계십니다!" 라는 위로의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다윗이 아비의 양을 지키는 목동이었을 때, 때로는 사나운 사자나 곰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사자나 곰은 애완 동물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비장하게 싸워야 하는 맹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양을 돌보는 목회도 때로는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이기 때문에 결코 쉬울 리가 없습니다. 

특히 작은 미자립교회에서의 목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말 힘든 사역 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매우 편안하고 쉬운 목회가 있다면 그것은 병든 목회일 것입니다. 오히려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이 목회의 중요한 본질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서 큰 교회의 귀족 목회를 부러워 하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목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받은 목회입니다 . 

앞으로는 목사가 되면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순수하게 헌신된 사람들이 사역자가 되고, 그런 바른 사역자들이 합심 해서 일을 할 때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한 증식 집짓기를 멈추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건물을 키우는 대신에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나서서 설치기 좋아하는 얼뜨기들이 아니라, 이름없이 빛도 없이 헌신할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들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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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47 2014/10/05 06:47
갈릴리로 돌아가자
2014/10/05 06:47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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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을 때마다 '점잖은 목사'와 '개같은 목사'를 생각해 봅니다. 한국교회에는 지금 '점잖은 목사'만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요. 양들을 해치는 저 이리를 막을 '개같은 목사'는 없는지요. 그리고 이 일이 어찌 목회자들만의 책임일까요. 스스로 동역자 라고 자처하던 모든 평신도들도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요! 우리가 언제 나 하나 잘먹고 잘살자고 예수를 따라 나섰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과연 예수를 따르겠다면서 가난한 이웃들과 배불러 죽어가는 부자들을 그냥 외면하고 이렇게 우리끼리만 건물 짓고, 흥청거리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것인지요. 

산에서, 빈 들에서, 강가에서, 그리고 어두운 예배당 한 구석에서 감동과 기쁨의 눈 물을 흘리며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그 처음 사랑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요. 먼 저 믿은 우리라도 소금을 좀 뿌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우리마저도 세상의 단맛 에 빠져 다시 세리와 창기로 돌아가야 하는지요.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귀족 목사님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처럼 이미 예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 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들어 보십시요. 이천년 전 목수의 아들로 유대땅에 오셔서,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시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변치않고 우리에게 말씀 하고 계시지 않은가요? 

"나를 따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 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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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35 2014/10/05 06:35
성전 안의 장사꾼들
2014/10/05 06:35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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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들 귀족목사님들의 개인기와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검토해 보았습니다. 현재 전국의 지역 교회들은 물론 주요 교단의 총회나 노회 지도부의 상당수가 이들의 절대적인 입김 아래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이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이 저질 정치꾼들처럼 돈봉투까지 뿌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 챙기기에 몰두해 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꾼들이 북적거렸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 내에도 온갖 잡상인들이 기생충처럼 서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간이 아주 크신 이 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교인들이 영육으 로 말라가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또한 사회 여론이 그들의 부정과 탐욕을 비난할 때는 적당히 연막을 쳐서 빠져나가거나, 그것도 잘 안되면 교인들을 동원하여 전면에 세우고 자신은 교회라는 성역의 울타리 뒤로 깊숙히 숨어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수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족님들의 개인기가 너무 탁월해 한국교회가 거의 거덜나게 생겼습니 다. 심지어는 "한국교회는 이미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었다"라거나 "한국교회는 예 수를 버렸다"고 까지 단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 상당수는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는지, 맨손으로도 바리새인 몇 명쯤은 순식간에 뺨을 치고 초상비로 날아 오를 정도로 엄청난 절정고수입니다. 양심에 철판을 삼겹으로 깔고 천사처럼 가장하여, 교인들을 속이며 등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심장이 약하고 내공이 약해 정말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정치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큰 힘을 이용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늑대와 같은 자들입니다.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의 눈물과 탄식은 외면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유전과 규례는 철저히 지키라고 강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내어 쫓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밥그릇에 금가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 르지 못 하도록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탐욕이 그때보다 못 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 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법자, 귀족 목사님들이 그래도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의롭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바리새인을 뺨치는 내공으로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이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유다처럼 예수를 팔고 있는 것일까요. 이들의 귀에도 영육으로 메말라버린 저 양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릴까요. 이들의 눈에도 저 양들의 목이 꺾여 늑대에게 찟겨지고 있는 모습이 보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양심에도 저 양들의 슬픈 눈망울에서 나오는 분노와 절규가 느껴질까요. 

하도 답답해서 묻고 있지만,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책 어디에도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외쳤어도 듣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돌아왔으나, 그들은 성경을 손에 들고도 끝까지 거역하였습니다. 차라리 개 귀에 명심 보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죽해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러다가 결국에는 불과 몇 십년 뒤인 AD 70년에 후일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강력한 로마 군단에 의해 처절하게 짓밣히고 찟겨져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 길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자랑하던 큰 건물, 헤롯성전도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이때 함께 무너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근 1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슬프게 무너진 거대한 헤롯성전을 생각하며, 오늘날 오로지 큰 건물, 큰 무리, 그리고 큰 사업을 추구하며 교회 대형화에 눈이 먼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을 바라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기 전에, 존경하는 신현우 교수의 짧은글을 먼저 인용하고자 합니다.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아직 잠들지 않은 그리고 결코 잠들 수 없는 깨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 글을바칩니다. 

나는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경건을 보수의 울타리에 가두고 학문을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고 실천을 교회의 울타리에 가두고 그리고 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힐 겁니다. 

역사의 암울한 시기에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교단에서 한 발작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힘드는 일까요? 

성경을 교리로 난도질하는 인본주의적 인습에서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꿇는 길로 가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목사님들은 모를겁니다. 그래서 저도 모를겁니다.

교회를 보며 갑갑해 하는 일반 성도들의 마음을, 이리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목사들을 보며 물려죽으며 분통이 터져가는 양들의 마음을 ... 

예수님을 잃은 중세카톨릭이 부패하였듯이 개혁정신을 잃은 개혁교회가 썪고 있는 것을 보며 혹시 우리가 양들을 지키는 개가 아니고 이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나운 개가 몇 마리만 더 있어도 좀 덜 할 터인데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양들이 죽는 것이 아닌지요. 소금은 없고 설탕만 있으니 썩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결심해 봅니다. 나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설탕보다는 소금을 뿌리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거룩한 목사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왜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 

양들 가운데 있다보면 우리는 양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바로 인도하지 못하는 거룩한 양같은 목사가 되거나, 이리 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잡아먹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 할 겁니다. 

점잖은 목사님들은 못 들으실 것입니다. 이리를 만난 저 성도들의 아우성을 ...

천사들의 찬양 소리만 들리실 터이니 ...

저는 이리를 물어뜯는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 신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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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32 2014/10/05 06:32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
2014/10/05 06:32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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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좋은 의미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반대로 은근히 권위를 내세우시기 위해 그렇게 부르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들이나 다른 교역자들을 '목자'라고 부르기도 하시는데, 이 대목에서 말씀을 좀 구별해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으나, 양들의 주인인 '진정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기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닙니다. 

구태여 말하면 목사는 '보조 목동'이나 '양치기 개'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 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지, 언제 '네 양을 치라'고 하셨는지 직접 성 경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도들은 목사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가 여러명 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목사님들께서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목자라는 명칭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주인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하나님이 목사님들에게 '주의 종' 노릇을 하라고 하셨지, 언제 '교회의 왕'이 되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오히려 '주의 자녀'입니다. 종이면 종답게 주인의 자녀인 교인들을 잘 섬겨야지 무슨 근거로 군림하려 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 교육'을 잘 시키라고 귀한 자식들을 기껏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이들은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자녀 학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족님들께서는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모두 주의 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동시에 성도 모두가 동등한 '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다른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맡겨진 고유의 책무이니, 아무일이나 나서서 월권을 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제발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교인들보다 성경을 몇 자라도 더 배웠으면 좀 똑바로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떤 귀족님들께서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러 하시며 교인들 을 쥐고 흔드는데,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게 하나같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분들은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전과 장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교회 세습을 하는 것도, 교회 돈을 빼돌려 개인사업하는 것도, 호의호식하는 것도, 심지어는 간통하다 들켜도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는 황당한 사람들입니다. 경건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인생들이, 마치 구약의 선지자나 예언자 행세를 하며 외식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늘 자기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종들이 무슨 철학을 

또한 근자에 들어 '목회철학'이니 '목회비전'이니 하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데, 비록 좋은 의도로 쓰더라도 적지 않은 거부감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좀 심하게 말을 하자면, 아니 종이 건방지게 무슨 철학이 필요하고 비전이 필요한지 정말 궁금합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신분인데, 종이면 종답 게 주인께서 성경에 시킨 일이나 빠뜨리지 말고 열심히 실천할 것이지, 무슨 소크라테 스나 플라톤이라도 되는 듯 구태여 철학 타령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목회철학'이란 용어 역시 과거에는 전혀 못 듣던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다소 시건방진 단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종들은 분수를 모 르고 주인의 자녀이신 교인들에게 자기의 철학과 비전을 내세우며 따르라니, 이 종이 '종님'인지 '종놈'인지 영 헷갈리는 판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할 때, 성경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면 되었지 무슨 철학이 따로 필요한가요.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언제 각자 만든 철학을 가지고 목회했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는 않나 늘 염려하며 경계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껏 그 목회비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좋은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몇 년도까지 교인 몇 명에 선교사가 몇 명이고 건물이 어쩌고 저쩌고 등 돈을 부지런히 긁어 모아 비지니스 확대에 열중하겠다는 이야기들이던데, 이런 얘기는 다른 분들이 하도 많이 지적하셔서 이 정도로 생략하기로 합니다. 하여튼 순진하고 충성된 교인들은 그 개똥 철학인지 비전인지를 따라서 총력 동원되느라 아예 등골이 빠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차분히 앉아 성경 공부와 구제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큰 교회로 갈수록 일년 내내 각종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혹사시키는데, 이는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사업체 또는 학교에서 돌림빵을 당하고 주일이라도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와서 좀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일날이 더 바쁘고 더 피곤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쌍코피가 정기적으로 터지는 교우도 여러 명 보았습니다.

귀족님들께서야 잡다한 일들은 부목사들에게 맡기고, 평일에 편안한 웰빙책상에 앉아 멋진 설교를 준비하신 후, 주일날 목소리 높여 화끈한 설교 몇 번 하시면 되는지는 잘 몰라도, 그 알량한 목회 비전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한 것인데, 이 분들은 오히려 여기에 군살을 더덕 더덕 발라서 내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의 하나인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우리는 실패했다"고 고백하면서,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 주지 않더라"는 결론을 인정했었던 일도 잊어선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주일에만 우리끼리 모여 분주히 활동하는 '선데이 크 리스천'이 아니라, 오히려 평일에 사회 속에서 소금이 되는 '에브리데이 크리스천'이 아닌가요. 과연 초대 교회 기록에서 우리가 요즘 바쁘게 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 행사나 프로그램들을 한두 가지라도 찾아 볼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런 것 역시 교 회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비지니스 마인드로 추진되는 것은 아닌가요. 마치 예수님은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바쁘게 고생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평소에 매우 경건한 척 하시며 목에 기브스하고 무게 잡기 좋아하시는데, 제발 교만 좀 떨지 마시고 진정으로 겸손해질 순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설사 목사가 아니라고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온유하고 겸손하며 관대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사람들 앞에서 천사처럼 경건한 척 열연하는 이 분들 뚜껑을 살짝 열어 보면, 거룩이라고는 개벼룩만큼도 찾기 힘들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동안의 아픈 경험에서 얻어진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님들은 거의 한결같이 눈부신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기시는데 중소형차로 좀 바꾸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스스로 종이라면서, 귀족같은 차를 타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의 인품이 모자라는 것은 참아도, 품위없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절대 못 참으시는지요. 남들이 이를 비판하면 대부분 교인중에서 누가 선물했다고 핑계를 대는데 목사가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진짜로 고급차를 사주는 통 큰 교인도 더러는 있다니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돈 복은 많은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가 선물로 고급차를 누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이 남습니다. 거절하거나 팔아서 다른 좋은 일에 쓰시면 안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귀족 목회 

뭐니뭐니 해도, 귀족님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돈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어떤 요상한 명분과 이유를 붙여서라도 기필코 돈을 챙기시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점만 유심히 잘 관찰해 보아도 귀족 목사이신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숙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흔히 잘 알려진대로, '돈, 명예, 그리고 여자' 이 세 가지야말로 이 귀족님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업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인들의 영혼보다는 교인들의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교회를 사유화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교회 재정을 직접 관리하며 예산과 결산을 불투명하게 하는 목사님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행태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악행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어느 형제님에게 받은 메일에 의하면, 자신의 교회는 출석 교인이 7000명이 넘는 큰 교회인데 지난 15년간 단 한번도 수 백억 원의 교회 재정에 대해 결산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심지어 어느 대형 교회는 교회 건물 등기를 아예 담임목사의 이름으로 등록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목사의 친인척들로 교회 직원들을 도배하거나, 교회 재정 집행시에 각종 이권에 관여하고, 기타 이 분들의 범죄적 행실을 구체적으로 다 서술하려면 '귀족행전'을 한 권 추가로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분들의 눈에 띄는 행태들 위주로 몇 가지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목돈 버는 재미에 외부 강사로 일년 내내 꾸준히 돌아다니시는 것이 이 분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 본봉은 그대로 굳고 추가로 부수입이 더 짭짤하다니, 이들의 눈에는 세상이 참 평안하고 즐겁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런 강사 교류 인맥을 넓히기 위해 반대로 막대한 교회 예산을 들여 외부 강사들을 수시 로 청빙하는 것은 너무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로 짜고 상 대 교회 돈을 나눠 먹는 셈이니 정말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어떤 능력있는 고참 귀족님은 몇 년만에 월급 외에도 5억이상 벌었다고 들었는데, 뭔지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께서 안밖으로 말씀 사역에 너무나 수고를 하신다고 때로는 보약을 갖다 바친다고 하니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란 가요가 히트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해야 복받는다고 수시로 강조하시며 부추기신다고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긁어 모아 정말 자신들의 일이 아닌 주의 일을 하려는지 묻고 싶습니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하시던 예수님이 따르는 무리들에게 언제 헌금 요청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천명이나 사람들이 몰려 와도 대형 천막 하나 없는 빈 들에서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는지요. 제자들도 옷 한벌만 가지고 돌아 다녔다고 하는데, 이 분들도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헌금 만큼만 사업을 벌리시면 안되는지 따져보고 싶습니다. 

또한 헌금을 조금 내거나 못 내는 교인은 결국 기죽어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교회 모임에서 늘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 있게 되고,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이나 유명 인사가 장로나 권사가 되어 나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들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는 마치 중세교회 성직매매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요. 이것도 확실히 해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아울러 왜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무너지는지 그 이유를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귀족님들께서는 목회를 비지니스로 여겨 교인수를 중요시하며 교회당을 크게 짓 는 것을 성장 목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이들의 체질상 웬만해선 고치 기 힘듭니다. 그리고 원래 잔 머리가 잘 돌기 때문에 설교를 미끈하게 잘하시고, 심지 어 어떤 때는 하도 잘한 자신의 설교에 스스로 감동받아 강단에서 눈물을 짜기도 합니다. 이 분들은 정말 순진한 교인들 홀리기에는 아주 탁월난 재능을 지닌 듯 합니다. 아마 안방드라마 연기자로 나갔어도 크게 대성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런데 설교 내용은 주로 교인들 귀에 듣기 좋은 웰빙 설교만 즐겨 하니,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항상 복받고 잘되고 평안하고 성공한다는 설교는 잘하시는데,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자는 내용은 잘 말하지 않는다니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는지요. 게다가 요즘은 평일에는 골프에 낚시에 신나게 놀러 다니시다가, 주일이 되면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표절하시는 저질 얌체분들도 있다던 데 정말 양심에 방탄조끼를 채우신 분들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가끔은 교인들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설교할 때도 있으시다면서, 어느 분의 말씀대로 어째서 자신의 묵직한 돈주머니는 평생 회개하지 않는 것인지요? 

그리고 감투를 너무 좋아하셔서 너저분한 명함 한 다섯 개 정도는 기본이고, 떼로 몰려 다니며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허접 단체에도 많이 가입하신다던데, 쓸데없이 돌아다니 지 마시고 그 시간에 자신의 교인들이나 잘 돌보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분들은 수구정권이나 수구언론, 재벌기업, 대형교회 등을 비판하면 바로 종 북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매도합니다. 그동안 챙겨둔 재산과 인맥을 지키고 늘리는 데에 이들 수구세력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하늘도 한번 쳐다보거나 '정의'라는 단어도 좀 찾아보시고 자숙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더구나 이들은 각종 교단 선거에서 금품을 살포하고 패거리를 만들고 자기 사람을 챙 기는 등 각종 추태 보여 주기를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는 막가는 정치판에서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아닌가요. 이로 인해 교단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전도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는 하는 건지 답답합니다. 누가 이 분들 앞에서 감히 목사 임기제니 무슨 회장 단임제니 이런 말을 꺼내면 난리가 난다는데, 차라리 지나가는 개 귀를 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언론의 자유 이딴 거 무지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과식하는 것이 자꾸 노출되서 괴롭다고 하니, 그나마 약간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특히 말이 많은 놈들은 무조건 싫어합니다. 또한 자기들은 뒤로 할 짓 안할 짓 고루고루 못된 짓을 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들통나면, 언제나 주님의 사랑 운운하며 사랑으로 모두 다 덮자고 얼버므리는 것이 이 분들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가장 한심스럽고 우려스러운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이 귀족님들과 귀족교회를 하나의 성공모델로 삼아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흉내내며 불철주야 달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두루 갖춘 한 대형교회가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통해 근처에 있는 다수의 소형교회들을 무너뜨리는 현상 못지 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그 대형교회를 모델로 너도 나도 모두 열을 받아 자기들도 저렇게 대형화하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비판자들의 입에서 "대형교회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말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울러 대형교회의 좋은 장점들은 거의 희석되고, 다른 이유도 물론 있지만 단순히 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족쇄가 되어 따거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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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6:25 2014/10/05 06:25
교회 내의 무법자들
2014/10/05 06:25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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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계 뉴스를 잠시만 들여다 보아도, 지금 한국교회는 이 귀족님들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계 소식만 보면 너무 속이 상하고 우울해져서 아예 안 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들이 그동안 뉴스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크게 사고를 쳐놓았는지,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누구나 한국 개신교는 너무 썩었다고 주저없이 말합니다. 요즘 흔히 듣는 '개독교'니 '먹사'니 이런 불명예스러운 용어들은 세인들이 우리에게 손수 붙여준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의 권한과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 이유로 담임목사만 바로 서 있다면, 적어도 고질적인 교회 문제의 80%는 긍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 문제 대부분이 담임목사가 바르게 처신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 교인들이 교회에 무슨 직접적인 이권이나 사심이 있다고 목사나 장로들에게 저항하고 분란을 만들겠습니까.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귀족님들이 자기 욕심을 챙기다가 발생하는 불협화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무법자처럼 '교권'과 '위선'이라는 쌍권총을 차고 좌충우돌 설 치게 된 데에는, 이들을 가르친 신학교는 물론 신도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그에게 순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직분자는 물론, 설사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설 수 있는 대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이런 근거 없는 신앙적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야 절대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순종은 옳을 때만 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목사가 어떤 사실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라고 요구할 경우, 신자는 순종이 아닌 거절을 해야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귀족님들이 교회내에서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에 이르기까지 삼권을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회에 큰 상처를 줄 경우, 잘못된 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적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이 언제 목사들에게 탐욕, 축재, 횡령, 교회 세습, 치부, 성추행, 외식, 파당 짓기, 사기, 명예 추구, 월권, 교회 사유화, 성직매매, 교만, 사치, 거짓말 등을 해도 좋다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법 어디에 목사에게 교회 재정, 행정, 인사, 관리 등의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하여 왕같은 권력을 행사하라고 되어 있나요. 

더구나 교인들과 다른 교역자들이 담임목사와 함께 사역하는 대등한 동역자들이지, 목사를 떠받드는 무슨 부하 직원이나 들러리인가요. 교회 안의 모든 직분자는 평등하며 직무의 구분은 있으나 계급 차별이란 없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신이 아닙니까. 이 귀족님들의 상당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거역하고 교회법도 거스리는 자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는 주저없이 그들을 '무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행태가 더욱 극에 달하여, 스스로 자신들이 한국교회의 공적 1호라고 자임하는 듯 한 모습을 갈수록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과 쇠퇴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평안하고 흥청거릴 때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회개, 구원, 실패, 지옥, 고난, 희생, 겸손, 경건, 헌신, 나눔 그리고 섬김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즉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이들은 귀에 듣기 좋은 성공, 희망, 축복, 평안, 희락, 천국, 선교 등을 즐겨 노래부릅니다.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으나, 반대로 설탕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닌 세상의 천더기로 전락하고, 교인들은 이런 단맛에 깊히 길들여져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영적 당뇨병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성직자는 영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을 양산하고, 다시 그 무지한 신도들이 모인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의 놀이터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비상한 시기이고,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이 글에서 논하는 '귀족 목사'란 단순히 큰 교회의 목사나 부유한 목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목사라도 스스로 신앙 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쫓으며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목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큰 교회나 부자들이 무조건 다 잘못했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미리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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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1:49 2014/10/05 01:49
한국교회의 무법자들
2014/10/05 01:49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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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래 전 호주 어느 현지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젊은 목사님이 수 년 동안 목회하던 교회의 임기가 끝나서 사임을 하고, 새로운 임지를 향해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사 당일 그 분과 가족들은 허름한 승용차 뒤에 작은 트레일러 하나를 끌고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실은 것이 그 목사님과 가족들의 이삿짐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트레일러라고 해봐야 손수레보다 서너 배 큰 정도이니 얼마나 들어 가겠습니까.

더욱 놀란 것은 교인들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요란한 이임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교인들과 일일이 다정하게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셨고, 교인들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준 것이 송별회의 전부였습니다. 새로운 임지까지는 차로 3 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한국교회의 여러 목사님들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목사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크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국내선 비행기표 몇 장 제대로 안 챙겨준 인정머리 없는 교인들에 대해 많이 서운해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생각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연히 '주의 종'다운 검소한 모습을 실천하며 정상적으로 살고 계실 뿐입니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데에 익숙하게 살다가 보니, 순간적으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호주 교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처럼 검소하게 사신다고 합니다. 실제로 필자도 한 백인 목사님 일가족이 여름 여행 중에 모텔이나 호텔을 구하지 않고, 친구 목사님댁에 들려 거실 쇼파와 바닥에 슬리핑백을 깔고 자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유해도 되나 

목사가 너무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겠으나, 반대로 중산층을 넘어 부유층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언젠가 "교인 중에 굶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목사도 숟가락을 내려 놓으라"고 말씀 하셨던 어느 원로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교회나 교우들 중에는 가난한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터이고, 나아가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에도 틀림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정상적인 목사라면 어떻게 부유해질 틈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처럼 입고 있던 양복마저도 있는 대로 남에게 자주 나누어 주다 보면 저절로 검소하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난히 사치를 떠는 한국교회의 일부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양을 돌보는 목사라면서, 고급차를 타고 다니시며 식사 때마다 입으로 비싼 음식들이 잘 넘어 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잊지 말라는 뜻이며 성경 여러 부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혹시 요즘 귀족 목사님들은 성경을 필요한 부분만 오려서 들고 다니시는지요. 점입가경으로 심지어 어떤 귀족님들은 돌보라는 고아는 돌보지 않고 엉뚱하게 시키지도 않은 교회 여비서나 여신도 돌보기에만 몰두해 사고를 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속이 다 터질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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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1:46 2014/10/05 01:46
교회의 본질을 함께 생각하는 글 - 도전 받는 목사 왕국
2014/10/05 01:46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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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이 웁니다.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이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목동들의 털깎기에 추워서 떨며 웁니다.
이리들에게 찢기고 아파서 웁니다. 상처 입은 형제들을 보며 분통해서 웁니다. 배가 고파 울고, 삶에 지쳐 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웁니다. 언제부터인지 착한 목동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배부른 목동들이 웃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라지고, 돈과 세력과 교권이 판을 칩니다. 스스로 '종'이라던 목동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양들을 약탈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들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한 예루살렘보다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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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4 21:27 2014/10/04 21:27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이찬수 목사 (분당우리교회)
2014/10/04 21:27 | 말씀과 찬양


말씀/설교 : 이찬수 목사 (분당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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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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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1 04:26 2014/06/11 04:26
십일조에 대하여
2014/06/11 04:26 | 말씀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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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관련된 모든 질문에 대해 진리의 말씀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할 때, 단순한 지적인 질문에 대해서 지적인 답변을 갖는 것 이상의 참된 복음의 진리와 원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한 성령님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진리는 삶의 전반적 영역에까지 자유를 주는 전인적인 능력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런 면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질문이든지 마음에 품고 있지말고, 던지고, 성경적인 답변을 얻는 것은 더 성숙한 신앙생활로 나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자, 구체적인 내용을 함께 나눠보도록 합시다. 

십일조 뿐만 아니라, 신앙의 전 영역을 “율법과 복음”의 큰 틀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적 규정이 많이 있습니다.  제사, 안식일, 정결법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그 중에서 십일조도 하나의 구약의 율법적 규정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한 올바른 성도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님의 복음(Good News)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적 규정으로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의 의무 조항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인은 삶의 모든 관점을 율법적 관점이 아니라, 복음적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음적 관점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고,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을 누리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종은 의무를 다해야만 징계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징계와 관계없는 자들입니다.  올바른 자녀는 징계가 두려워서 일하지 않습니다.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부모를 섬길 따름이지요.  이것이 복음적 관계가 있는 자가 행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설사 징계를 받더라도 연단, 성숙을 위한 훈련의 과정이지, 완전히 넘어 뜨리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단번에 거룩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심으로 더 이상 제물이 필요 없도록 하셨습니다(히 7:27).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엄청난 양의 짐승들이 제물로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서 더 이상 그러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혹은 ‘복을 받기 위해’ 제물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고 은혜를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만을 소중히 여기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셨습니다.  즉,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충실하면서, 의롭고 자비로운 삶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신 것입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가 더 근본적인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입니다.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십분의 십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십분의 십을 다 드려야 한다’가 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은혜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십일조 규례를 신약적으로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수익의 십분의 십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자, 은혜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한 성도가 갖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용액이 얼마인가를 기본적으로 산출해야 합니다.

지역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낭비해서도, 너무 풍성하게 갖고 있어도 안됩니다.  삶의 전 영역을 가장 효율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사업 혹은 연구를 위한 투자, 자녀 양육, 노후에 대한 대책 등과 같은 삶의 책임을 요하는 영역은 기본적인 사용액에 첨가 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항상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금액을 먼저 정해 놓고, 나머지는 그 금액의 양에 관계없이 다 구제와 헌금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내 삶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내 것이다라는 개념에서,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사용하는데 필요한 것을 후원받는 다는 개념이 진정으로 은혜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런 개념이 될 때 ‘세금 공제 후의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냐, 공제 이전의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냐?’의 질문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러한 질문은 십일조의 부담을 줄여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소유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므로, 참다운 십일조 정신을 퇴색시키는 자세입니다. 

인본주의가 팽배하고, 경쟁, 물질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의 시대에 이러한 전적 하나님 소유의 개념을 갖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앙인이라면 이 전적 하나님 소유의 개념을 은혜와 감사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에 참다운 신앙인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적 개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십분의 일을 제정해 주신데는 하나님의 지혜와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중,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일조는 레위 지파와 구제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레위 지파가 갖게 되는 분량은 구제 부분을 제외했을 때 일반 지파의 평균 수입보다 조금 낮게 책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성막 사역과 제사 사역 등 영적인 사역이 유지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십분의 일이라는 구체적인 숫자의 의미가 사역과 구제를 위해서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헌금드릴 때 기준을 ‘최소한’ 십분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가 십일조 헌금을 올바르게 사역자를 위해서 사용하고(개 교회의 사역자 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사용), 그리고 구제를 위해서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가난한 자도 ‘최소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헌신과 은혜의 감사를 표식할 수 있으며, 또한 삶의 ‘최소’ 생계를 후원받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로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십일조 이상을 드렸고, 그 정신을 예수님은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는 이러한 과부를 향하여 올바른 구제를 행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최소한’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질 때,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십일조와 관련해서 자주 인용하는 말라기서의 기본 의미입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구절을 축복받기 위한 도구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언약백성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 언약 관계 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인한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은 영원히 보호,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측면에서는 그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적 자세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표식으로 십분의 일을 드리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축복으로 보여 주시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십일조의 근본적인 정신은 물질의 영역 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시간, 봉사, 관계의 영역등 삶의 전 영역에서 신앙인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떼어 드린다는 개념을 갖기 보다는, 나의 24시간 전체, 생각의 전체, 삶의 전체를 헌신의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시간의 십일조, 능력의 십일조, 봉사의 십일조 등을 구체적인 교회 사역과 관련해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만 더 덧붙인다면, 이러한 질문이 나온 근저에는 오늘날 교회들이 헌금에 대해서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반적 인식의 탓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헌금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은혜의 원리에 맞게, 그리고 투명하게 헌금을 바르게 사용할 때 십일조 정신을 통한 하나님 나라 선포는 더욱 이 시대에도 능력있게 발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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